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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저녁있는 삶을 누리는 게 복지의 시작”

작성자 : 손학규   |   등록일 : 2013-12-12   |   조회수 : 3453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7

 

 

 

   
▲ <이상과 현실>, 2013-한효정

오늘날 몰아치고 있는 세계사적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준비와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통제받지 않는 글로벌 자본의 탐욕과 시장만능주의적 ‘미국식 자본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노출시키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전 세계의 저항을 분출시켰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경제체제, 연대와 복지에 기반을 한 사회 개혁 그리고 인간 중심의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치 체계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미국 월스트리트로부터 제 3세계 국가에까지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복지국가’ 모델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며 가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8개월간의 독일생활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독일 사회에 대한 경험은 한 사회가 발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결국 그 사회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였다. 독일은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빈부격차가 확대 재생산되는 현실에 대응하여 오히려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정책적으로 채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가장 먼저 원전 폐기 계획을 세우고 기후변화에 대비하여 재생에너지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이처럼 독일이 시대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국가 발전을 이루는 중심에 정치 지도자들이 있음을 의미 있게 바라보게 된다. 독일의 성공은 통합의 정신과 그 실천에 있다. 통합은 공동체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개인의 삶을 보장하고 있다. 복지 제도는 이러한 기본권을 보장하고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는 바탕을 이루고 있다. 독일의 복지제도는 독일 기본법(헌법) 제1조에 명기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다. 동법 20조 1항은 독일이 민주사회복지국가임을 명시함으로써 모든 국가 정책이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복지는 헌법적 가치인


‘인간 존업성’의 실현

 

 

헌법 정신에 기초하여 장애인 복지는 태생적, 신체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평등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의료복지는 개인의 신체적, 생리적 질병을 사회적 결함으로 인식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도록 기본 생활안전을 보장하는 사회부조 등의 다각적인 복지제도는 개인을 공동체 일원으로 보호하고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진보 이념의 대명사로 인식된 복지가 보수정치인 비스마르크가 그 지지기반인 노동계급을 포용하기 위해 도입한 사회정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3년 3월 발표된 ‘2011년 사회복지를 위한 지출 통계’에 따르면, 현재 복지 제도는 생계지원, 노인과 최소소득자 지원, 의료 지원, 장애인 지원, 간병 지원,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한 복지 그리고 기타 지원 등 7분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그물망 체계는 복지 사각지대가 없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 연금생활자 노인들의 생활은 가히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노인들은 천당에 갔다가도 독일이 천당보다 더 좋아 다시 찾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복지는 재정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사구시 정신으로 접근해야 하며, 결코 이념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복지국가의 실현은 확고한 역사의식과 실천의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만들어 갈 사회에 대한 비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회통합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

독일의 교육을 보면서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마당이 되어야 함을 확신하게 됐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교육 분위기, 저학년 어린이들에게 학교는 놀이터였고, 고학년 학생들에게는 토론의 광장이었다. 대학교 무상교육은 바로 교육이 공동체 정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직업훈련법(BBiG)에 근거한 직업교육은 독일 교육 제도의 중요한 부분으로 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직업 준비과정, 직업양성 훈련, 직능향상 훈련, 직업 재훈련 등을 통해 배출된 노동력이 임금이나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적절한 대우를 받는 환경은 입시경쟁으로 왜곡된 우리의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 독일에서 교육권은 사회통합과 복지사회 실현의 기본 토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장은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교육을 철저하게 공공재로 보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를 우리나라에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마음 깊이 절감하게 된다.

 

 

노동자의 저녁 있는 삶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

 

 

한편, 독일 노동자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노동과 개인의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노동은 삶의 경제적 근거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존엄성의 근거이다. 노동권은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위상도 강화되어야 한다. 전국사용자협회(BDA, 우리나라 경총에 해당) 회장 훈트(Dieter Hundt)는 대담 속에서 사용자들도 강력한 노조를 원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독일 노총(DGB)의 국제담당 국장 자흐(Frank Zach) 역시 노조도 강력한 힘을 가진 사용자 단체를 원한다고 이야기하였다. 협상 당사자가 서로 내부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져야 노사 협상의 실효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며, 사회적 안정과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이러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상대를 지배와 복종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상호 견제와 함께하는 파트너로 보는 기업 문화로의 진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노동조합이 일정하게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노동자의 권익도 지키고 노동자의 에너지와 창의력이 기업 발전에 적극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노조에게는 더욱 높은 수준의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세력화 욕구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비정규직 해소를 위해 능동적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독일의 경제력은 사회정책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독일은 벤츠나 BMW, 폭스바겐, 지멘스, 보쉬, 바이엘 같은 세계적 대기업이 많이 있지만, 실상 국가 경쟁력의 바탕은 세계 최고의 제조업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중소·중견기업들이다. 독일 중소기업 연구소(lfM)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독일 중소·중견기업은 전체 기업의 99.6%에 달하며, 일자리의 70.9%를 담당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수출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은 진정한 국가 경쟁력의 현주소를 알려주고 있다. 중소기업은 정부의 지원 하에 직업훈련교육과 연계되어 교육생의 80%를 소화함으로써 우수 노동 인력을 확보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경쟁력 강화는 보수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진보세력도 이를 위한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술 강국을 만들고 산업 기반을 튼튼히 하여 번영을 이룩하는 것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재원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투자, 노동자의 저녁 있는 삶을 보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경제 영역에서의 통합이며, 새로운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된다.

 

 

통일복지국가를 향한


‘다양성 위 통합’ 절실

 

 

독일통일이야말로 통합의 정신과 실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서독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독을 지원했으며 경제적 지원에 상호주의적 조건을 달지 않았다. 동방정책을 입안한 브란트의 보좌관 에곤 바르의 표현대로 ‘접촉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장자(長者)의 관용’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면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마음을 열도록 해야 한다. 경제적 교환 원리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상호주의를 벗어나 진정성을 담아 증여하는 유·무형의 선물은 남·북간의 대결과 증오를 해결하고 호혜적 상호답례가 이어짐으로써 통일로 향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마르셀 모스, 증여론). 통일은 남북이 같이 웃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통합의 바탕에는 관용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치문화가 있다.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래 8번의 수상을 거치는 동안 모두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독일은 내각제의 불안정성을 연정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소수당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그 의견을 정부에서 수렴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 정치의 전통을 어느 정치학자는 ‘다양성 위의 통합(Diversity and Unity)’이라고 표현한다. ‘다양성 위의 통합’은 다수당의 관용을 전제하며, 정치문화를 진보시키는 중요한 가치이다. 연정을 위해서는 소수당의 정책과 입장을 수용해 주어야 하며, 때로는 다수당의 정책이나 지지층의 이해와 어긋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 위의 통합은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의 연속성을 가져와 정치뿐만 아니라 국가정책의 안정성도 담보해 준다.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다양성 위의 통합’이 절실함을 느낀다. 국정원의 불법적 대선 개입으로 온 나라가 분열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고립무원 속에서 야당과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 안타깝다. 국가 권력기관들의 총체적인 불법적 정치 행위는 법리적 문제를 떠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통합의 정치이며, 민주주의 수호의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책임 있는 행동이다. 국가 권력이 종북 대 반공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를 부추기고 한쪽 생각만을 강요함에 따라 우리 사회는 전 세계 유일하게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후진성을 보이고 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는 절대 존중한다(볼테르)”는 말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통진당의 북한에 대한 불투명한 자세나 노선, 정치행태에 대해 다수가 공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발상은 민주적 정당정치를 위협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오히려 국민의 민주적 역량을 믿고 그 선택에 맡겨야 한다. 

 

 

건강한 국민이 대한민국의 경쟁력

 

 

진보 세력도 시대 변화와 국민적 요구를 가슴깊이 수용하고 자기 혁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87년의 민주화 체제로부터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진영논리와 관습화된 이념, 그리고 기득권에 젖어 국민적 요구와 변화하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면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시대에 문명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다음 시대에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 그런 집단은 이전 시대의 전통, 이해관계, 이념에 너무 깊이 젖은 탓에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이 이야기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지를 진심으로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역사적 소명을 다한 집단은 새로운 정치 프레임과 역사 발전을 위해 겸허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주역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희생의 자세가 필요하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는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갖는다. 국가가 나에게 도움을 준다는 믿음은 개인의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에 더욱 큰 역동성을 준다. 정의와 번영이 함께 이루는 나라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국민이 편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실상, 우리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이고 우리가 그려온 미래사회의 모습이다. 복지국가, 사회 통합과 정치 통합, 통일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내부에 증오, 분열, 대결의 담론이 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 구도를 깨야 한다. 정치가 스스로 뼈를 깎는 자기 개혁을 실천해야 한다. 나의 이익을 양보하고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주는 관용 정치가 실현되는 정치 문화를 세워야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은 하늘이고,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정치의 중심을 백성에 두었다. 이제 우리의 정치 중심에도 국민을 두어야 한다. 국민이 편한 나라는 요원하거나 상상적 이야기가 아니다. 세종대왕께서 이미 실천했던 현실 가능한 일이다. 정치가 변하면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이다.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경쟁력은 건강한 국민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국민이 국가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만큼 대한민국은 강한 나라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치통합, 사회통합 그리고 남북통합은 우리 시대에 맡겨진 사명이며, 통일복지국가는 우리가 후대에 남겨줘야 할 비전이다. 국민들은 정치가 이를 실천하고 실현할 것을 명확하게 요구해왔다. 이제 정치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글·손학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당 대표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저녁이 있는 삶>(2012),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2006),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20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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